프랑스 적응기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

Laboratoire bleu 2021. 4. 3. 08:57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껏 일련의 연구 성과들을 남들에게 소개하는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소개해보라고 했을 때에는 쉬이 글이 써지지가 않는다.

 

요즘은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서 유럽 곳곳의 학교에 지원서를 내는 시즌이다. 보통 유럽에서 박사를 지원할 때에는 해당 학교에서 열리는 “Doctoral Program”에 지원해서 박사과정 등록 및 Fellowship 확보를 진행한다. 그와 동시에, 진학하고 싶은 연구실 교수님과 직접 컨택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교수님과 직접 컨택을 할 때에는 통상적으로 두 가지 서류가 요구가 된다. Curriculum Vitae (CV)Cover Letter 두가지가 요구된다. CV는 그간의 이력을 작성하는 서류이며, Cover Letter는 상대 교수에게 내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 형식의 서류이다.

 

Cover Letter를 작성하는 중인데 너무 어렵다. 사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인지하고 있다. 나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공부해왔으며, 이 공부가 나의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었고, 나의 여러 경험들이 향후 나의 연구에 어떤 강점들을 부여해주는지, 해당 연구실의 지원자로서 내가 지니는 강점 등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지에 대한 순서와 논리구조는 어렴풋이 머리에 새겨져 있다. 문제는 그간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박사를 하고 싶은 이유, 내가 이 분야를 장기간 연구해보고 싶은 이유. 모두 그리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이 길을 선택하고, 이 분야를 선택한 것에 큰 이유는 없다. 숭고한 이유는 없었고, 복합적이고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현재 내 연구 분야는 Biomedical Engineering이다. 환자들의 병리학적인 진단과정에는 여러가지 검사들이 요구된다. 이때, 일련의 검사 및 진단과정의 간소화에 기여하는 것이 내 연구 분야이다. 광학 장비를 이용해서 환자들의 환부를 찍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병리학적인 진단에 도움을 주는 연구이다. 이 연구를 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누나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누나와 같은 사람들의 경우,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이 아플 시 병명도 빠르게 진단되어야 하며, 치료도 빠르게 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시간의 검사를 버틸 체력도 건강도 되지 않는다. 독감 시즌, 신종 인플루엔자, 눈병,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누나가 한번 아플 때마다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두 눈으로 봐왔던 우리 가족들이었기에 그런 시국이 도래할 때마다 각별하게 주의했었다. 누나가 병원에서 그 고통을 다시 감내해야 하는 것을 그 누구도 원치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단순했다. Medical이라는 글자를 봤고, 의료라는 용어는 어린 시절부터 누나 때문에 수도 없이 접해왔던 단어였기에 그저 ? 누나한테 도움되려나라는 생각을 했고 (어린 시절부터 나한테 거의 디폴트인 사고이다.),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Polarimetry (편광학), Machine learning이라는 키워드가 겹쳐지면서 이 분야를 선택했던 것뿐이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는 논조로 상대방에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할 때에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 분야 및 진로 설정도 그랬다. 계획, 목표, 선택의 이유 모두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왔다. 이런 선택을 해온 사람으로서 내 선택에 논리를 부여해서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는 논조로 나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은 썩 쉬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내가 해오지 않았던 생각들이었기에, 내 자신을 어필하는 연습을 한다는 생각으로 좀 더 힘을 나보려고 한다. 그래도 박사과정을 지원하면서 열정을 가지고, 내 연구 분야의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어필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이 도전의 결말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이 일련의 과정들은 내게 있어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밤에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머릿속 마구간에 갇혀 있던 말들이 들판으로 자유롭게 뛰쳐나가는 느낌이 든다. 생각들을 쓰는 연습을 계속 해 나가자는 결심이 선다. 바쁘다고 글쓰기 소홀히 생각치 말자…. 너무 도움이 되는 글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