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의 기본은 상호 간의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유대관계의 깊이 또한 상이해진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무엇으로 결정될까라는 질문이 뒤를 잇는다.
서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서 우리는 어휘의 수준과 정도를 조절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함과 동시에 내 위신이 깎이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전부터 나는 이 부분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이 깊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내가, 그 아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한들 내가 한국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동일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언어 장벽. 의사소통과 랩 미팅, 학회 등에서 큰 문제가 없어왔지만, 깊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생각은 두명의 친구에 의해서 깨졌다.
두 친구 모두 한 파티에서 만났다.
석사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20년 가을.
K는 이란에서 온 남자아이였다. 폴 워커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다부진 체격에 잭 블랙의 위트를 겸비한 친구였다. 십자인대가 나가기 전까지는 이란 청소년 국가대표로 축구선수를 하던 친구였다. 이때도 둘 다 십자인대를 영어로 몰라서 서로가 검지를 겹치면서 십자가를 만들어보고는 아이처럼 웃었다. 나와 같은 투머치 토커에 축구, 역사 등 관심사도 일치해서 만날 때마다 꽤나 뜻깊은 이야기를 했다. 복잡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끔씩 어려운 용어가 나와야 할 때면 잠깐씩 머뭇거리지만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미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했다. 시침과 분침이 일치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 나의 박사 합격 소식을 들은 K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해주었다. 룸메이트들을 하나하나 붙잡으면서 "내 친구가 뮌헨공대를 가!" "너희 얘가 대체 어떤 걸 해냈는지 알아?"와 같은 낯간지러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으면서 기뻐해 주었다. 몇 달간 정말 마음고생을 다 한 상태에서 이제 실패했다를 인지하면서 번아웃이 되려는 시점에서 합격을 받았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지만 K가 해준 축하가 나를 하얀 수국처럼 웃게 만들었다.
A는 멕시코에서 온 여자아이였다. 눈동자는 내가 본 적이 없는 듯한 유리구슬 같았다. 토끼 같은 앞니는 웃을 때마다 그 모습을 이따금씩 비추었다. 그날 밤도 밤새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다.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선입견 타파"라는 키워드와 그 아이가 "비건"이었다는 점이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올 때면, 족발, 떡볶이, 잡채, 파전, 김밥 등 한식을 대접해주었다. 이슬람교, 힌두교 등 다양한 아이들에 맞게 한식을 준비해봤지만, 역시나 비건은 제일 어려웠다. 많은 한식 요리에는 액젓, 계란, 육수, 오뎅 등 은근히 동물성 재료들이 소비가 된다. 고민 끝에 선정했던 것은 나물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아이가 다양한 비건식을 찾던 도중에 김치를 알게 되어서 액젓을 안 넣은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아이였다. 그래서 오이소박이, 시금치나물, 고사리나물, 곤드레나물, 미역줄기에 주먹밥을 만들어가서 이번에는 그 아이의 방으로 직접 찾아갔다.
함께 나물을 먹으면서 "비건"의 이유와 삶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공유했다. 이따금씩 비건 쿠킹을 도전해보던 차에 흥미로운 시선을 들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 날 이전까지 말해왔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선입견"으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다. 분야는 너무나도 다양했고, 우리가 은연중에 내비칠 수 있는 선입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서로가 상황들을 묘사할 때 언어에 의해 머뭇거리던 순간들이 있다. A와 나는 그럴 때마다 단어들에 얽매이지 않고 쿨하게 자신만의 언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뭐든 알아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그 아이가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주관을 가지고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아는 아이였다. 저녁 식사부터 시작했던 이야기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이야기를 10초 이상 한 번도 쉬지 않고 10시간 가까이를 이야기한 셈이다. 이야기가 멈추는 순간, A의 눈은 여전히 유리구슬 같았다.
K처럼 이가 딱딱 맞는 톱니바퀴 같은 친구는 한국에서도 몇 없었다.
A처럼 메기는 소리, 받는 소리 처럼 나와 비슷한 성향의 말하기 습관을 가진 친구는 한국에서도 몇 없었다.
우리 셋 모두 다른 모국어와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가치관을 공유함에 있어서 다른 조건들은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들을 공유할 수 있기에 시너지 효과가 좋았다.
생각의 결이 일치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설령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지라도 오히려 좋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아보고 싶다.
1.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 | 2021.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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