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 사람은 무엇으로 맺어지는가 - 1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by Laboratoire bleu 2021. 9. 28. 01:00

본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의 기본은 상호 간의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유대관계의 깊이 또한 상이해진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무엇으로 결정될까라는 질문이 뒤를 잇는다.
서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따라서 우리는 어휘의 수준과 정도를 조절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함과 동시에 내 위신이 깎이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전부터 나는 이 부분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이 깊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내가, 그 아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한들 내가 한국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동일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언어 장벽. 의사소통과 랩 미팅, 학회 등에서 큰 문제가 없어왔지만, 깊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생각은 두명의 친구에 의해서 깨졌다.

두 친구 모두 한 파티에서 만났다.

석사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20년 가을.

K는 이란에서 온 남자아이였다. 폴 워커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다부진 체격에 잭 블랙의 위트를 겸비한 친구였다. 십자인대가 나가기 전까지는 이란 청소년 국가대표로 축구선수를 하던 친구였다. 이때도 둘 다 십자인대를 영어로 몰라서 서로가 검지를 겹치면서 십자가를 만들어보고는 아이처럼 웃었다. 나와 같은 투머치 토커에 축구, 역사 등 관심사도 일치해서 만날 때마다 꽤나 뜻깊은 이야기를 했다. 복잡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끔씩 어려운 용어가 나와야 할 때면 잠깐씩 머뭇거리지만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미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했다. 시침과 분침이 일치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 나의 박사 합격 소식을 들은 K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해주었다. 룸메이트들을 하나하나 붙잡으면서 "내 친구가 뮌헨공대를 가!" "너희 얘가 대체 어떤 걸 해냈는지 알아?"와 같은 낯간지러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으면서 기뻐해 주었다. 몇 달간 정말 마음고생을 다 한 상태에서 이제 실패했다를 인지하면서 번아웃이 되려는 시점에서 합격을 받았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지만 K가 해준 축하가 나를 하얀 수국처럼 웃게 만들었다.

A는 멕시코에서 온 여자아이였다. 눈동자는 내가 본 적이 없는 듯한 유리구슬 같았다. 토끼 같은 앞니는 웃을 때마다 그 모습을 이따금씩 비추었다. 그날 밤도 밤새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다.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선입견 타파"라는 키워드와 그 아이가 "비건"이었다는 점이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올 때면, 족발, 떡볶이, 잡채, 파전, 김밥 등 한식을 대접해주었다. 이슬람교, 힌두교 등 다양한 아이들에 맞게 한식을 준비해봤지만, 역시나 비건은 제일 어려웠다. 많은 한식 요리에는 액젓, 계란, 육수, 오뎅 등 은근히 동물성 재료들이 소비가 된다. 고민 끝에 선정했던 것은 나물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아이가 다양한 비건식을 찾던 도중에 김치를 알게 되어서 액젓을 안 넣은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아이였다. 그래서 오이소박이, 시금치나물, 고사리나물, 곤드레나물, 미역줄기에 주먹밥을 만들어가서 이번에는 그 아이의 방으로 직접 찾아갔다.

함께 나물을 먹으면서 "비건"의 이유와 삶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공유했다. 이따금씩 비건 쿠킹을 도전해보던 차에 흥미로운 시선을 들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 날 이전까지 말해왔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선입견"으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다. 분야는 너무나도 다양했고, 우리가 은연중에 내비칠 수 있는 선입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서로가 상황들을 묘사할 때 언어에 의해 머뭇거리던 순간들이 있다. A와 나는 그럴 때마다 단어들에 얽매이지 않고 쿨하게 자신만의 언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뭐든 알아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그 아이가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주관을 가지고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아는 아이였다. 저녁 식사부터 시작했던 이야기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이야기를 10초 이상 한 번도 쉬지 않고 10시간 가까이를 이야기한 셈이다. 이야기가 멈추는 순간, A의 눈은 여전히 유리구슬 같았다.

K처럼 이가 딱딱 맞는 톱니바퀴 같은 친구는 한국에서도 몇 없었다.
A처럼 메기는 소리, 받는 소리 처럼 나와 비슷한 성향의 말하기 습관을 가진 친구는 한국에서도 몇 없었다.

우리 셋 모두 다른 모국어와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지만, 가치관을 공유함에 있어서 다른 조건들은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들을 공유할 수 있기에 시너지 효과가 좋았다.

생각의 결이 일치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설령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지라도 오히려 좋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아보고 싶다.

에펠탑의 어느 여름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