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에 중독된 상태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대한 중독”이라는 글을 유튜브 댓글에서 우연하게 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10년째 무명 배우 생활을 하고 계신 분의 사연에 달린 댓글이었다.
댓글을 읽고 나도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대학 입학 이후에 돌이켜 보면, 무엇인가에 매달려서 끝을 봐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듯하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나에게 이런 문장들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너는 진짜 성실하다.”
“너는 진짜 뭘 해도 될 놈이야.”
사실 어른들이 판단할 수 있는 학생의 성실성 판단 지표는 성적, 학급반장으로서 말 잘 듣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성적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반복학습을 통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던 입장에서 성실성보다는 참을성이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남에게 성실함이라고 비치던 지표였던 성적은 과학고에 진학하면서 그 마저도 소실되어버렸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난 풍물패를 했었다. 각자 악기를 하나씩 고르고 그 악기를 3년간 배워 나가면서 함께 공연물을 제작하는 활동을 했다. 보통 다른 학생들의 경우에는 하나의 악기를 고르고 3년 동안 열심히 연습을 거듭해서 수준급의 실력들을 함양한다. 나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남들보다 동아리를 늦게 들어갔던 이유도 있지만, 나는 다른 학생들처럼 꾸준히 하나의 악기를 3년을 연습했을 때, 그들처럼 좋은 실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아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왔기에 난 이 생활을 즐김과 동시에 동아리에 남기 위해서 꽹과리, 장구, 상모 등 다양한 악기에 손을 대보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3년의 시간 동안 즐거운 동아리 생활을 한 결과, 내 동기들은 하나의 악기에 대해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3가지 악기에 있어서 모두 할 줄은 알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특출 날 것이 없는 소위 말하는 잡캐가 되어있었다.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서 학부 3학년부터 나는 학부 연구생 생활을 하면서 연구실에 출근을 하였다. 첫번째 연구실에서는 정말 열정을 불태워 가면서 연구에 매진했었다. 하지만, 논문 지도력이 안되시는 교수님, 과도한 야근으로 인해 피폐해진 생활로 인해서 1년 만에 다른 주제를 하는 다른 연구실로 옮겼다. 두번째 연구실에서도 열정을 불태워 가면서 연구에 매진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학부 연구생 6개월, 석사 1년의 기간 동안 논문 연구를 끝맺지 못하고 프랑스로 넘어오게 되었다. 두 기간동안 나는 많은 장비들을 다뤘었고, 많은 논문들을 읽으며 많은 지식들을 함유했었다. 하지만, 내 손에 들려 있던 결과물은 기간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다가왔다.
프랑스에 와서는 아예 새로운 주제의 연구를 진행했다. 생명의공학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접했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신소재 혹은 전기전자에 해당하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물리학적인 현상 해석을 통해서 생명을 분석하는 일은 나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난 2년간 코로나 기간을 겪는 와중에 맞이했던 새로운 분야였기에 많지 않은 연구 기회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았었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제 막상 박사 입시를 시작하며 나의 이력을 쭉 정리하고 남들과 비교해보기 시작하니 내 이력은 너무나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남들은 한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 경험을 차근차근 쌓아 나가며 자신들의 능력을 결과로써 증명해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해오지 않았기에 내 이력에 남게 된 결과물은 그 들에 비해 너무나도 희미했다.
이러다 보니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저 댓글처럼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내 실력이 부족하다 라는 것을 인지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오는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력을 돌아보며 낮아지던 자존감이 납득이 되는 듯했다.
이제는 내 연구에 대한 그 결실을 서서히 보여줄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설령 내가 저 댓글에 작성된 “가능성에 중독된 상태”일지라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박사과정생이 된다면 내자신의 과거가 회피를 하던 과거가 아니란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 영화는 끝나기 마련이고, 끝나지 않는 영화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계속 중독되어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상황이 없다. 저 댓글은 내게 긍정적인 되새김을 반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박사과정은 연구자가 되는 진정한 도입부라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Ph.D. Motivation의 일부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Ph.D. candidate는 일방적으로 가르침만 받는 학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h.D. candidate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눈 앞에 있는 task를 하나씩 해결해 나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저는 그런 Ph.D. candidate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내 이력으로 박사를 원하는 곳에서 바로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내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나는 task를 해결해 나갈 가능성만 있는 사람이 아닌 task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Thank God It's Finally Over (1) | 2021.08.23 |
---|---|
파리가 살아나고 있다 (4) | 2021.06.18 |
모더나 백신 1차 접종 완료! (3) | 2021.05.23 |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할 것 (2) | 2021.04.11 |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 (7) | 2021.04.03 |
댓글 영역